산행기/경상북도

성주 구봉산(277.0m)- 오두산(172.0m)- 왕자산(175.5m)- 두주산(118.0m)- 당산(95.8m)

산여울 2023. 4. 4. 06:50

ㅇ. 산행일자: 2023년 4월 3일(첫째 월요일)

ㅇ. 산행지: 성주  구봉산(277.0m)- 오두산(172.0m)- 왕자산(175.5m)- 

                            두주산(118.0m)- 당산(95.8m) 및 문화유적 답사

ㅇ. 날씨: 맑음

ㅇ. 참석자: 김명근, 이종서, 송형익 이상 3명

ㅇ. 산행시간: 오전 7시 20분~ 오전 11시 40분( 4시간 20분)

 

ㅇ. 산행코스: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1230-1'도로변 공터- '벽진면 봉계리 1266'농장-

                      구봉산 정상- '대가면 흥산 4길 103' 전원주택- 오두산 정상- 흥산 2리- 흥산교-

                      왕자산 등산로 입구- 왕자산 정상- 가곡마을(봉계 3리)- 두주산 정상-

                      정곡 마을- 당산 정상- 출발지점   총 걸은 거리: 9.66Km

 

ㅇ. 산행지도

구봉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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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지역 미답산 답사 산행이 아직 덜 끝났으나, 근래 들어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듯해서

     몸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당분간은 가까운 지역의 야트막한 산 위주로 답사를

     하기로 하고, 오늘은 대구 인근의 성주 지역에 있는 미답산 답사 산행에 나섰습니다.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1230-1' 당산 산자락의 '동강한강로' 도로변 좁은 공간에 주차를 하고, 주변

     일대의 지형을 잠시 둘러보고는, 진행 방향인 '홍선 1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산행에

     들어갑니다.

     도로 건너편에 보이는 야트막한 당산 정상부와 들날머리 모습.

     50m쯤 진행하니 우측으로 구봉산 능선 끝자락으로 오르는 임도 들머리가 나오고, 이리로

     꺾어 오르면~~~

     몇 발짝 안 올라가서 농장 안으로 올라서게 되고~~~

     이방인의 출현에 멍멍이가 격하게 반겨주는 농장을 빠져나가니, 펑퍼짐한 능선상에 넓게

     자리 잡은 '창원 유 씨' 문중묘역이 잇달아 나오네요.

     계속해서 능선상으로 이어지는 묵은 임도를 따라 진행하노라면~~~

     철망 펜스가 설치된 사유지도 한차례 지나고 하더니~~~

     잠시 후 사유지 철망 펜스를 빠져나가며 좌측 흥산리 쪽에서 올라오는 상태가 좋은 임도와

     합류하게 되고, 연이어서 나오는 임도 삼거리에서 정상 방향인 좌측 임도를 따라 오르면~~~

     얼마 안 올라가서 다시 임도 갈림길이 나오는데, 정상 방향인 좌측 임도를 따라 올랐더니,

     산사면에 넓게 자리 잡은 흑염소 농장으로 올라서며 길이 막히는지라 되돌아나와서, 우측

     임도를 따라 진행합니다. 흑염소 농장을 우측으로 우회해서 오르노라니, 전면으로 구봉산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이네요.

     갈림길이 또 한 번 나오나 정상을 가늠해서 좌측으로 오르면~~~~

     임도가 잠시 끊어졌다가 몇 발짝 개척해 오르니 산허리를 감아도는 상태가 아주 좋은 임도로

     올라섭니다. 좌우를 살펴보니 임도는 구봉산 정상부를 우회해서 이어지는 듯해서~~~

     바로 건너편 길 없는 산사면으로 올라붙어 한차례 치고 오르니, 잠시 후 능선상으로 올라서며

     뚜렷한 능선길과 합류하게 되고~~~ 

     좌측 능선길을 따라 한동안 오르면 올라서게 되는 능선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몇 발짝

     더 이동하니~~~

     별 특징 없는 구봉산 정상(277.0m)에 올라섭니다. 어찌 된 셈인지 선답자의 흔적이 전혀

     보이 지를 않네요. 표지기 걸고 인증샷을 한 후~~~

     오두산으로 이어가기 위해 직전 능선 분기점으로 돼 내려 선 뒤, 우측 남릉을 따라 내려

     가노라면 희미한 능선길이 그런대로 이어지더니~~~

     '옥산(인동) 장 씨' 묘역을 한 곳 지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독농가(흥산 4길 105)의 철책 펜스 옆 길로 내려서고~~~

     독농가를 좌측으로 돌아나가면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수렛길(흥산 4길)에서, 오두산 능선

     끝자락을 가늠해서 우측 길을 따르니, 또 한 채의 아담한 전원주택이 나오네요.

     전원주택 좌측 펜스를 따라 능선 쪽으로 접근하니, 자그마한 소류지 제방을 거쳐~~~

     능선 안부의 잘록이 고개로 올라서고, 좌측 능선길을 따라 오르노라면~~~

     잘록이 고개에서 10여 분 만에 오두산 정상(172.0m)에 올라섭니다. 인증샷을 하고는~~~

     두주산으로 이어가기 위해 지도상의 새산막 마을을 가늠해서 북동릉을 따라 내려

     가노라니~~~

     20여 분 만에 새산막 마을의 규모가 제법 큰 농가 안으로 내려서네요. 마을을 빠져나가니~~~

     얼마 진행하지 않아 '마을 표지석'과 '흥선 2리' 버스정류장이 있는 새산막 마을 어귀 사거리에

     이르고, 정류장 벤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 지형을 둘러보노라니, 오룩스 맵상에서

     미답산 조사를 할 때 미처 눈에 띄지 않아서 미답산 목록에서 제외되었던 왕자산이 참외

     비닐하우스 단지 너머 멀지 않은 곳에 건너다 보여 마치 횡재를 한 듯 기분이 좋습니다.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라, 산행 코스를 급 변경해서 왕자산부터

     먼저 답사하고 두주산으로 이어 기기로 하고, 도로를 따라 왕자산 자락으로 진행합니다. 

     흥산교를 건너고 참외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를 통과해서~~~

     왕자산 능선 끝자락의 농로 삼거리에 이르니, 뜻밖에도 산뜻한 왕자산 등산로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게 보이고,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니~~~

     이번에는 '왕자산 등산로 안내도'까지 설치를 해놓은 등산로 들날머리가 나오네요. 바로

     좌측길로 진행해도 될 듯했으나 뚜렷한 길을 따라 몇 발짝 더 진행하니~~~

     조성을 잘해놓은 '경주 최 씨' 쌍분 묘역 직전에서 좌측 계곡 쪽으로도 산길이 열립니다.

     높다랗게 설치된 시멘트 수로(水路) 아래를 통과해서 완만한 사면길을 따라 오르노라니~~~

     불과 5분 여 만에 '옥산(인동) 장 씨' 묘 2기가 있는 능선상으로 올라서고~~~

     우측 받침목 계단 길을 따라 한차례 가파르게 치고 오르니~~~

     완만한 능선상으로 올라서며  최근에 묘역을 정비한 흔적이 역력한 '옥산 장 씨' 묘역들이

     잇달아 나오는 걸로 보아, 왕자산 일대가  '옥산(인동) 장 씨'문중의 선산인 듯하네요.

     등산로 안내도가 서있는 들머리에서 25분여 만에 이정목과 벤치가 설치된 왕자산 정상

     (175.5m)에 올라서는 데, 뜻밖에도 산이조치요 대산 아우 일행들의 표지기가 걸려있는 게

     보여, 그 옆에 필자의 표지기를 걸고 인증샷을 하고는~~~

     몇 발짝 되돌아 내려와~~~

     오룩스 맵 상에 '거북바위'로 표시된 바위 삼거리에서 우측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며 두주산

     방향으로 이어갑니다. 

     각도를 바꾸어 가며 이쪽 저쪽에서 아무리 봐도 거북이 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그런대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한동안 내려가면~~~

     산자락의 '옥산 장 씨' 묘역을 거쳐서~~~

    비닐하우스 참외 단지로 내려서고~~~

     가곡교를 지나~~~

     두주산의 들머리로 잡은 가곡마을로 들어서니~~~

     두주산 들머리 우측에 재실 같은 한옥 건물이 보여 들려보니~~~

     계신재(繼愼齋)라는 '인동 장 씨' 문중의 재사(齋舍)이네요. 이곳은 인동인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 1566-1644)과 아들 지분헌(知分軒) 장이유(張以兪, 1598-1660)

     부자(父子)위한 추모재실입니다. 翁(옹) 張鳳翰(장봉한)의 講學之所(강학지소)로

     四間建物(사간건물)로 건립되었으며, 冶城人(야성인) 恭山(공산) 宋浚弼(송준필)이

     지은 上樑文(상량문)이 있다고 하네요.

     계신재 옆 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능선상에 넓게 자리 잡은 '옥산(인동) 장 씨' 문중 묘역이

     나옵니다. 옥산은 옛 인동의 별호라고 하네요.

     계속해서 능선상으로 이어지는 포장 임도를 따르면, '문화 유 씨', '순흥 안 씨' 묘역이

     잇달아 나오더니~~~

     비포장 임도로 바뀌며 '성산 배 씨' 묘역도 나오고 하더니~~~

     '계신재' 입구에서 18분여 만에, 역시나 대산 아우 일행들의 표지기가 걸려있는 두주산

     정상(118.0m)에 올라섭니다. 인증샷을 하고 한동안 쉼을 한 뒤~~~

     맞은편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서 지금 한창 연녹색 새순이 적당하게 자란 '엄나무 순'과

     '오가피 순'을 채취해가며 여유롭게 진행을 하노라면~~~ 

     어느새 마지막으로 답사하게 될 당산이 지척에 빤히 건너다 보이는 두주산 능선 끝자락의

     임도 삼거리에 이르게 되고, 좌측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몇 발짝 안 내려가서 2차선 아스팔트

     도로인 '동강한강로'와 합류합니다.

     우측 도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나오는 '봉계 1리 삼거리'에서 우측 '봉계 1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몇 발짝 진행하니, 좌측 주택 사이로 당산으로 오르는 통로가 보여 이리로

     올라붙었더니~~~ 

     경작지와 묘역 사이를 지나서~~~

     봉계1리 삼거리에서 10여 분 만에  원형 동판 소삼각점이 설치된 당산 정상(95.8m)에

     올라서네요. 인증샷을 하고~~~

     좌측 사면길을 따라 내려가면 텃밭 옆을 지나~~~

     잠시 후 출발 지점에 도착하며  정오 12시도 채 안되어 9.66Km에 놀며 쉬며 4시간 20여

     분이 소요된 '구봉산- 오두산- 왕자산- 두주산- 당산' 5개 산 연계 산행을 모두 마치게 되고,

     시간 여유가 너무나 많아 벽진면에 소재한 문화유산 답사에 나섭니다.

 

◐.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

     해동청풍비는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비분강개하여 향중사회에 항일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경에 피체(被逮)되어 잔혹한 위협과 집요한 회유에도 동요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순절한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 1860~1911) 의사를 기리기 위하여 1936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은 1937년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의미를 감지한

     일제 식민경찰에 의해 파괴되어 계천(溪川)에 버려졌다가 1946년 유림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해동청풍비의 곁에는 왜경이 비석을 파괴하려 하자 자결로 항거한 부인 박 씨의 기열비

     (紀烈碑)가 함께 세워져 있다.

     비석은 평평한 바닥돌 위에 비신을 세운 간단한 형태로 이수(螭首)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320㎝, 넓이 110㎝, 두께 45㎝의 규모로 되어 있으며, 현재의 비신은

     건립된 뒤 일경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다시 수습하여 복원했기 때문에 당초 파괴할 때의 흔적과

     다시 맞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해동청풍(海東淸風)'의 큰 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946년 수습 복원하였을 때, 비석의 건립경위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짓고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해동청풍비는 건립연대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비를 세우게 된 동기와 그 주인공인 장기석   

    의사의 충의와 절개, 왜경에 의한 파괴 및 그 파괴를 저지하기 위한 부인의 자결을 통한 항거,

    광복 후 파괴된 비편을 수습하여 재건하고, 거기에 김창숙의 글과 김구의 글씨를 새겼다는

    데서 역사적·교육적인 측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의열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성주군청 홈페이지>

◐. 수촌고택

     수촌고택은 조선시대 철종대 천석꾼 거부 여진사가 건축해 살던, 조선시대 후기 양식의

     경상도 중부지방의 양반가 고택으로 성주군의 대표적인 고택 중 하나입니다. 

◐. 백원문

    생려효자 치사옹 여중화 효자 정려문(生閭孝子 致思翁 吕中和 孝子 旌閭門)

     효자정려는 나라[國家]의 심사에서 보통 죽은 자(死者)에게 내려지며 산자(生者)에게 내려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생전에 효자 정려는 살아생전에 나라로부터 받는 정려로 극히 드문

     일이며 여중화(吕中和)는 생전에 효자 정려를 조선 현종 2년 (1661년)에 왕명으로 정려를

     받았습니다. 살아생전에 정려를 받은 효자를 생려효자라 하고 고려와 조선 모두 합해서

     생려효자는 여덟(8명)인데 포은 정몽주 선생이 처음입니다

     여중화(吕中和)는 효성이 지극하여 살아생전에 효자 정려 은전을 조선 현종 2년(1661년)

     왕명으로 정려 은전을 받아 고을사람들이 정문(旌門)을 세웠으나 스스로 사양하여 겸손히

     "나는 정려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 못된다"라고 사양하여 정문(旌門)을 헐고 또 고을에서

     다시 정문(旌門)을 세우니 또다시 스스로 사양하여 헐었다. 부군(府君) 사후 28년 후 향토

     사림에서 효자문을 중건(1739년) 하였다. 이렇게 두 번이나 겸손하게 사양한 후 건립된

     효자문은 전국에서 유일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Ryeojh>에서 인용

    원정 여선생 유적비(圓亭 呂先生 遺跡碑)

     경상북도 기념물 제48호. 1516년(중종 11)에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이 향토제자들에게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론하기 위해 창건한 것으로 1664년(현종 5)에 현손인 성암(聖巖)

     효증(孝曾)이 이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회당의 3칸 대문채에는 "어모문(禦侮門) "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업신여김을 막는 문"

     이란 특이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방형 대지 주위에 토석담장을 쌓고 남측 중앙에 솟을대문을 세운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두고 북측에 남향하여 월회당이 있고, 그 전면의 좌·우에 전사청(典祀廳)과

     관리사가 대향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를 이루고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월회당은 전국에서 최초로 여씨향약吕氏鄕約을 가르치기 위해 1516년(중종 11) 봉산

     (수촌리의 자연마을)에 창건되었으나 화재로 소실했으며, 1664년(현종 5)에 그의 현손인

     서암西岩 여효증吕孝曾(1604~1679)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했다. 월회당月會堂이라는

     명칭은 ‘월일강회月日講會’의 줄임말로, 한 달에 한 번 모여 향약 강회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월회당은 한국 최초로 여씨향약을 강의하던 교당敎堂인 동시에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하여 송준필(宋浚弼)·김창숙(金昌淑)·

     여상윤(吕相胤) 등이 서명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장소이기도 하다.  <인터넷 발췌>

◐. 원모재(遠慕齋)

     이 건물은 한성좌윤에 증직된 여윤검이 부모의 삼년상을 마치고도 슬픔이 남아 있어

     몇 칸의 재실을 지어 “원모재”라 편액 한 후 후손들이 여윤검의 효성과 학덕을 추모하는

     재사로 사용되었다. 건물을 처음 건립한 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기간이 오래되고 풍우에

     퇴폐되어 1890년(고종27)에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또 1927년 재차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인터넷 발췌>

◐. 원정고택

     원정(圓亭)은 조선 성종 12년에 태어나 연산군, 중종, 인종을 거쳐 명종 8년에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학자요 문신(文臣)이다. 원정은 중국의 남전여씨(籃田呂氏) 향약(鄕約)을

     성주 월회당(경상북도 기념물 48호, 성주군 벽진면 성주로 2495-수촌리)에서 향토의

     자제들에게 향약 교육을 실행한 학자이다. 이후 조선 전국에 향약을 실시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시니어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