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싶은산

남원 황산(697m)-정산(531m)

산여울 2010. 4. 22. 09:53

 

  

인월 황산(697m)

황산대첩과 지리산 성모상, 그 재미있는 이야기들

    박초월 묘~왼편 골짜기~골짜기 왼편 등성이~서북릉~고스락~서릉(나천과 나란히)~군화동 옆 또는 그 역순으로, 약 2시간30분이 소요된다.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함양을 잇는 24번 국도변, 운봉읍과 인월면 경계 근처 나천(광천) 냇가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 황산(697m)이다. 1,915m의 천왕봉을 중심으로 1,000m대 봉우리들이 즐비한 거대한 산줄기 곁에 700m도 안되는 산이어서 그리 볼품 있는 산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황산은 작고 오밀조밀하며 유래가 있는 산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황산은 경관이 좋다. 주로 소나무인 숲이 울창해 멋이 있고, 머리부분은 우뚝 솟은 바위로 되어 있다. 나천과 24번 국도와 나란히 뻗은 산줄기는 바위등성이로 이뤄져 있고, 피바위가 있는 나천쪽으로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고 있어 노송과도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또 큰 산이 아니어서 시간과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 은발들이 옛날 옛적 일들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며 가볍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게다가 이 산은 지리산의 높고 큰 산들의 턱 밑에서 그 산들을 조망하는 재미가 있다. 저기에 천왕봉과 중봉, 하봉이 있고, 봄이면 철쭉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래봉과 덕두산이 보인다. 지리산 뿐만 아니라 장수 장안산, 장수-임실 경계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천황산, 바위가 많은 고남산, 함양 오봉산을 볼 수 있고, 넓게 펼쳐진 운봉과 남원의 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황산, 황산대첩, 조선조 창건

   황산 산행이 더욱 뜻있는 것은 황산대첩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고려 우왕 때 배 500척으로 쳐들어와 온갖 분탕질과 잔악한 일들을 저지르는 왜구를 이성계 장군이 크게 무찌른 이른바 황산대첩이 여기 황산 주변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황산대첩비가 있다.

   황산 자락의 화수리 비전 마을에 있는 황산대첩비를 먼저 둘러보고 황산에 올라이 산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당시의 싸움을 그려 보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일 것이다. 왜구의 분탕질로 당시 백성들은 몹시 고통을 겪었고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나라와 백성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황산대첩의 주인공 이성계 장군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장군은 조선조를 창건하게 된 것이다.

   황산대첩비가 있는 숲동산 옆 냇가 비전 마을 들머리에가왕 송흥록과 그의 제자 국창 박초월의 생가터가 널찍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또 황산 서쪽 산기슭에 박초월의 묘가 있다. 비전 마을 어디서나 황산과 박초월의 묘가 잘 올려다 보인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병선으로 금강 하구 진포(옥구군 상선면)에 쳐들어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원수 나세와 최무선 등을 보내 화통과 화포로 왜 병선을 모두 격파해 버렸다. 퇴로가 없어진 왜적들은 이때부터 발악하기 시작해 황간 화령 상주 선산 함양 들을 거치며 전라도 경상도 양광도(현재의 충청 경기 일부) 일대에서 노략질과 분탕질을 삼았다. 이로 인해 백성의 피해는 컸고 인심은 흉흉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투에 경험이 많은 이성계 장군을 삼도(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도순찰사로 임명해 왜적을 토벌케 했다.

   왜적은 남원성 공략에 실패하자 운봉현을 불사른 뒤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장차 북상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성계 장군은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황산에 이르렀다. 황산의 남쪽 광천(현재의 나천)은 협곡이어서 인월로 나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돌이 많은 황산의 북쪽 울도치(명석재)에 만일에 대비해 진지를 만들게 했다.

   이성계 장군은 더 나아가 인월 서북편에 있는 사창 마을의 앞산 정산(531m, 황산 동쪽 인월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봉우리)에 올라 인월에 있는 왜적의 동정을 살피며 싸움을 지휘했다. 정산 동쪽 산자락에 매복해 있는 왜적을 끌어내면서 나천 냇가 등 황산 일대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고, 왜적의 우두머리인 16세 소년 장군아지발도가 이성계 장군과 이지란 장군의 협공에 의해 사살되면서 왜적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 섬멸됐다. 왜구의 잔당 70여 명만이 지리산쪽으로 도망갔다 한다.

   이 황산 싸움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문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지리산 천왕봉에 있었던 성모상이 황산대첩과 관련돼 있다는 기록이다. 황산대첩이 있은지 100여 년 뒤인 1472년 당시 함양 군수로 있던 영남학파의 태두 점필재 김종직이 지리산을 두루 둘러보고 '유두류록'을 썼다. 천ㅎ왕봉에 있는 성모상에 날씨가 좋도록 해달라며 고사를 지내고 성모상을 묘사하며 그에 관한 이야기를 쓴 구절이 있다.

   '성모상의 갈라진 목을 이은 자국은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때 패주한 왜구 잔당이 성모가 이성계 장군을 도왔다는 분풀이로 칼질한 것' 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분풀이 내용이 더욱 재미있다. 왜구 총대장 아지발도가 일본에서 출정하려 할 때 그의 누이(또는 소실)가 해적질을 한사코 말렸다 한다. 여자를 하찮게 여기던 시절이어서 출정에 앞서 재수 없다며 그 여인의 목을 치고 떠나왔다. 그 여인은 죽기 직전 '기어이 가려면 부디 고려 땅에서 황산에는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한다.

   그런데 왜구가 함양을 거쳐 인월과 황산이 보이는 팔랑재를 넘을 때 길을 가는 할머니가 눈에 띄자 아지발도는 문득 자기 누이의 애원이 생각나 '근처에 황산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다. 그 할머니는 왕산(산천-함양 경계)을 가리키며 '저기 왕산은 있으나 근처에 황산은 없다'고 했다. 조선에 건너온 뒤 계속 마음 속으로 께름칙했던 아지발도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놓았고 방심한 결과 이성게 장군에게 사살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유두류록'에는 없으나 야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것으로 볼 대 왜구의 잔당들이 분풀이로 성모상에 칼질한 것은 팔랑재에 나타나 잘못 일러준 할머니가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가 현신하여 이성계 장군을 도왔다고 믿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지리산 성모상은 그 전에도 중대한 고비에 나라를 지켰다는 전설이 있다.

   아지발도를 죽인 것도 두 명궁인 이성계 장군과 이지란(귀화 여진인으로 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 장군의 협동으로 이루어졌다 한다. 아지발도의 갑옷이 원체 튼튼해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두 장군이 짜고 이성계 장군이 투구를 쏘아 맞혀 떨어뜨리고 투구를 줍는 틈에 이지란 장군이 그의 목에 화살을 쏘아 죽였다 한다.

   그밖에 황산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뿐만 아니라 황산 일대의 지명과 유적에 황산대첩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현재의 인월과 인풍의 지명은 당시 왜적이 거의 섬멸되어 가는데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자 달을 끌어다 밝히며 싸움을 끝냈고, 화살이 왜적쪽으로 잘 날아가도록 바람을 끌어왔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황산 바로 아래 냇물에 있는 피바위는 왜병의 피로 물들었고, 지금도 핏자국이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중군리 군화동 울도치(고개 위의 돌들이 적이 섬멸되자 자산들의 할 일이 없어져 아쉬워하며 울었다 함), 사창 서무(서쪽 무덤) 등등 관련된 이름이 많다.

   낮지만 조망 좋은 바위산

   장마가 계속되고 더위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던 8월 하순 지리산 반달가슴곰 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지리산 지킴이 이병채씨(남원 중앙새마을금고 이사장) 등 5명이 황산대첩비가 있는 현장에 모였다. 먼저 황산대첩비와 어휘각을 둘러보고, 마을 어귀에 있는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를 둘러본 다음 산행에 나섰다.

   이병채 회장의 안내에 따라 처음에는 가산리 방고개쪽으로 가다 양지저수지를 끼고 올라 울도치 서쪽 중턱 벌채 지역에서 쉽게 오르려 했다. 그러나 길이 포장되지 않고 좁아서 방고개로 올라가는 길가의 꽤 큰 비료공장(파란 지붕) 끝에서 산길로 들어섰다. 일행 가운데 2명이 잊은 물건을 가져오려고 승용차로 돌아가는 바람에 박초월 묘 왼편(북쪽) 골짜기 길로 올라가게 되어 일행은 둘로 갈라지게 됐다.

   비료공장 끝에서 산에 들어선 뒤 펑퍼짐한 등성이로 올라선 길은 곧 울도치 서쪽 골짜기를 왼편(동쪽)으로 내려다보며 동남쪽으로 황산의 고스락을 향해 주능선을 타게 된다. 울도치 서쪽 골짜기 일대 비탈은 과수원을 만들려는 듯 나무를 모두 베어내 등성이길은 숲과 벌채 비탈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벌채 골자기 중턱에 창고 모양의 큰 집이 세워져 있다. 벌채를 해서 동쪽으로 조망이 좋다. 장수 팔공산, 장안산, 봉화산, 함양 오봉산 등이 잘 보인다.

   공장 끝에서 산으로 들어선지 20분만에 박초월 국창의 묘 왼편 골짜기 길로 올라온 일행과 세 갈래 등성이에서 만났다. 여기까지는 벌채가 안되어 있어 길은 숲속으로 이어지고 꽤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산머리 부분에 이르면 산성터가 보인다. 이 회장은 남원 동쪽 일대 황산에서 가까운 곳에 8개 산성터가 있다며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고스락은 바위봉우리로 남북이 절벽으로 되어 있다. 고스락에 오르려면 나천을 따라 정산이 있는 동쪽으로 뻗은 줄기에서 오르거나 비전 마을이 있는 서쪽으로 뻗은 등성이에서 올라야 한다.

   북쪽 등성이를 따라 온 길도 슬그머니 서쪽으로 돌며 비전 마을에서 올라온 등성이와 만나 고스락으로 오른다. 이 고스락으로 오르는 길이 재미있다. 크나큰 바위로 되어 있는 대다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멋있는 소나무들이 많아서 우아한 풍치를 뽐내고 있다. 벼랑 위 널찍한 바위에 그늘이 드리워져 쉬기에 좋은 곳도 있고, 조망이 좋은 큰 바위도 있다. 고스락은 넓으나 바위가 드러나 있지 않고 풀들이 많아서 바위봉우리지만 바위 위 같지 않다. 황산 싸움 때는 물이 있어서 이용했다는 작은 연못 자국도 있다.

   인월, 인풍, 사창 마을, 화수리의 여러 마을, 명도치, 정산 등 황산대첩과 관련있는 곳이 대부분 보였고, 냇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나천도 내려다보였으나 피바위는 보이지 않는다.

   고스락에서의 조망은 물론 좋다. 장안산과 백운산, 금남호남정맥이 시작하는 영취산이 보이고, 그 너머 황석산도 보이며, 갓걸이산과 백운산 사이로 함양 백전면에서 서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도 보인다.

   지리산 천왕봉은 보이지 않지만 바로 그 옆 중봉부터 지리산 북쪽의 산들이 모두 보이며, 인월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팔랑재, 운봉에서 남원에 이르는 들과 인월의 들, 장수-남원의 팔공산 봉화산 천황산 고남산 등이 눈길을 끈다. 이병채 회장은 백두대간을 설명하며 백두대간에서 마을을 지나는 오직 한 마을인 노치 마을도 가르쳐 주었다.

   소나무 아래 벼랑 위의 널찍한 바위에서 주위의 산천경개를 조망하며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 재미도 좋았고, 이병채 회장의 옛날 지리산에 올라다녔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하산은 예정대로 고스락에서 나천과 24번 국도와 나란히 서쪽으로 빠지는 등성이를 타고 내려갔다. 황산에서 이 등성이가 가장 멋이 있다. 남족 나천쪽으로 깎아지른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고, 가끔 턱을 이루며 바위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그 위에 서면 시원하고 조망이 좋다. 이 바위봉우리들에는 소나무까지 어우러져 경관도 좋다.

   예상으로는 박초월 묘 남쪽 등성이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았는데, 내려가다보니 군화동 옆구리로 내려가게 된다. 논과 산의 경계에 넓은 길이 나 있고,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다시 비전 마을의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가 있는 냇가로 나선다.

   *산행길잡이 

   산행 기점은 울도치, 양지저수지 위 골짜기(벌채한 골짜기), 비료공장(서북릉 끝)이 있는 박초월 묘 왼편 골짜기와 묘 오른편 산줄기, 군화동 등이다. 그러나 교통과 조망 등 여러 면에서 박초월 묘 왼편 골자기를 타고 정상에 올라 묘 오른편 나천과 나란하게 뻗은 바위등성이를 타고 군화동 옆(서편)으로 내려오는 것이 가장 좋다.

   박초월 묘~왼편 골짜기~골짜기 왼편 등성이~서북릉~고스락~서릉(나천과 나란히)~군화동 옆 또는 그 역순으로, 약 2시간30분이 소요된다.

   *교통

   호남에서는 남원을 거치고, 충청 이북에서는 장수를, 영남에서는 함양을 거쳐야 하지만, 더 가까운 거점은 운봉과 인월이다.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 바로 가까이에 인월이 있고, 인월을 거치면 바로 운봉에 이른다. 황산과 황산대첩비는 인월과 황산 사이 24번 국도변에 있다.

   남원시에서 운봉과 인월로 시내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다니고 있으며, 남원~함양간 직행버스도 인월과 운봉에 선다. 인월이나 운봉에서 시내버스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황산대첩비, 어휘각

   운봉에서 인월로 가는 24번 국도를 타고 가면 운봉을 벗어나자 바로 왼편에 전촌 마을(운봉면 화수리)이 보이고 갈림길 들머리에 '황산대첩비 입구'라 새긴 돌이 서 있다. 들 가운데 냇가(나천 또는 광천)에 섬처럼 생긴 도도록한 숲이 있고 황산대첩비는 그 숲 남쪽에 있다. 고려 우왕 6년에 침입해 온갖 만행을 일삼고 있던 왜구를 뒤에 조선조를 창건하여 태조가 된 이성계 장군이 여기에서 섬멸한 것을 기려 세운 비가 황산대첩비다(사적 104호).

   황산대첩비에는 황산 싸움의 상황과 유래, 그리고 비의 건립 취지가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선조 10년(1531년) 왕명으로 비를 세우고 그 뒤 비각도 세웠고, 어휘각도 세웠다. 그러나 일제는 1943년 비의 글자를 쪼아내고 폭파까지 했다.

   1957년 비문을 다시 써서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보호각을 세웠으며, 1972년 신석호씨가 한글로 쓴 황산대첩기념비도 세웠다. 그래서 이곳에는 대첩비각과 사적비각이 있고, 일제가 폭파한 비(처음에 세운 비)의 조각을 모아 놓은 파비각이 있다.

   또 대첩비 구역의 왼편 산모퉁이에는 따로 어휘각이 있다. 황산대첩이 있었던 다음해 이성계 장군이 이곳을 찾아와 자기와 함께 싸운 8명의 원수와 4명의 종사관의 이름을 천연 바위에 새긴 것이다. 황산대첩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는 뜻을 나타낸 것인데, 이것도 일제가 항복했던 해인 1945년 폭파해서 그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대첩비 가까이 비전 마을 들머리에 있는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도 잘 꾸며져 있고, 여러가지를 배우고 살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반드시 들러 보아야 한다.

   글쓴이:김홍주:소산산행문화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