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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 1만 개 산과 봉 오른 문정남씨] "꾸준히 전진하면 불가능한 목표도 이룰 수 있어요"

산여울 2023. 12. 30. 23:02
1부터 1만까지 세어 본 적 있는가? 아니 1,000까지라도 세어 본 적 있는가? 가만히 앉아서 헤아리는 것도 어려운데, 1만 개의 봉우리를 오른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봉우리를 오른,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봉우리를 올랐을 수도 있는 문정남(75·만산회)씨다.
지난 6월 16일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자리한 단재 신채호기념관에 40여 명의 산꾼들이 모였다. '골수 산꾼'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이들이다. 만산회(萬山會) 회원들이 평균 오른 봉우리는 4,000개 정도 된다. < 신산경표 > 저자 박성태 선생을 비롯해 산이라면 죽고 못사는 꾼들이 모였다. 문정남 선생의 1만 봉 등정을 축하하기 모인 것이다.
모인 김에 합동산행을 했다. 신채호기념관 부근의 단재산(451m)을 올랐다. 늘 새로운 산을 올라 등정 봉우리 개수를 늘려가는 일명 '봉우리 헌터'들이기에 무명의 처녀산행지를 택했다. 이날 < 일천산의 시탑 > 을 펴낸 시조시인이자 본지 < 4000산 등산지도 > 를 감수한 김은남 시인은 문정남 선생에 대해 "굉장히 성실한 분"이라며 "목표를 세우면 탱크처럼 돌격하는 스타일"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산에 대한 열정은 대한민국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고 그를 설명했다.
문정남씨가 속한 만산회는 최다 봉우리 등정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골수산꾼들이 2008년 만든 모임이다. 만산회가 생기면서 이들의 봉우리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만산회 내에서도 문정남 선생은 모두 혀를 내두르는 산꾼이었다. 한 달에 25일을 산으로 내달리니 등정 봉우리 개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앞서 가던 이들을 한 명씩 따라잡아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그의 뒤를 바싹 좇고 있는 산꾼이 심명보(77)씨다. 육군 중령 출신인 그는 문 선생의 산행 파트너이자 선의의 경쟁자이며 9,700여 개의 산봉을 올랐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는 이종훈(80·본지 < 4000산 등산지도 > 감수) 선생이 최다 등정자였으나 심명보씨가 타이틀을 가져간 후, 몇 년 전부터 문정남 선생이 선두에 올랐다. 결국 그는 혀를 내두를 만한 1만 봉우리 돌파를 해냈다.
무명봉 포함하면 2만 봉 넘어
이들이 헤아리는 산과 봉우리의 기준은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다. 가령 지리산의 경우 천왕봉과 중봉 등 이름이 붙은 봉우리는 모두 개수에 포함하고, 1432m봉처럼 이름이 없는 봉우리는 개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름의 기준은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시중의 도로지도(영진·성지), 월간 < 산 > 같은 등산지도에 기재된 산과 봉이다. 이밖에도 현지에 표지석이 있거나 안내판에 산 이름이 표기된 경우도 모두 포함된다. 해발 고도 100m 이하의 산도 포함해 지도에 산이라 표기된 건 다 헤아리는 셈이다.
그는 "높은 산보다 낮은 산이 등산로도 없고 덤불과 가시로 가득 찬 경우가 많아, 막상 산행은 더 힘들다"고 한다.
"큰 산일수록 걱정이 없어요. 능선에 산길이 나 있거든요. 낮은 산은 길이 없고 가시덤불이 울창해요. 200m 산이 500m 넘는 산보다 더 힘들어요."
그는 등정을 증명하기 위해 산을 헤아리기 시작한 2000년부터 지금까지 산행지를 모두 한글파일에 기록했다. 6월 16일 단재산 산행에 참가한 손님들을 위해 그가 오른 산행 목록을 책으로 만들어 선물했다. 5월 31일까지 오른 총 1만145개 산과 봉우리가 기록되어 있다. 순번과 산 이름, 산 높이, 소재지, 산행일, 산행일 순번, 안내산악회를 따라간 경우 회비와 산악회명을 적었다.
예를 들면 1만140번째로 오른 조리봉은 '청도 304'라고 적힌 삼각점과 정상 표지석이 있으며 높이는 676m에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위치하고, 5월 31일 올랐으며, 산악랜드산악회 산행이었으며, 회비는 3만5,000원이고, 2,717일째 산행이었음을 기록했다. 또 혼자 산행하기보다는 일행과 함께 산행하는 그의 특성상, 동행인이 등정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무명산에 가까운 산들이라 표지석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라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기가 어렵고, 고령이라 GPS 같은 기계를 사용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일흔다섯의 고령이지만 산에 가면 보통 6시간 산행에 평균적으로 15km를 하루에 걷는다. 8시간 산행도 예사이며 온 종일 산행해도 봉우리를 3개밖에 추가할 수 없을 때도 있고, 7~8개를 오를 때도 있다. 만약 높이만 표기된 무명봉도 포함했으면 2만 개가 넘었을 거라고 한다.
봉우리 헌터들은 산행 스타일이 일반인과 다르다. 가고자 하는 산이 종주할 수 있도록 능선이 이어져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정상을 갔다 내려와 도로를 따라 이동해 다시 산을 오르고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한 달에 많이 갈 때는 26일을 산에 갔어요. 일 년으로 따지면 266일이 가장 많이 간 해고요. 목적지가 지방이다 보니 보통 새벽 4~5시에 일어나서 집에 돌아오면 밤 10~11시예요. 밥 먹고 다음날 산행준비하면 밤 12시가 넘는데, 이걸 매일 반복하는 거죠. 그러니 엄청 힘든 거죠. 이 이야기를 하면 믿기 어려워하는데 같이 동행한 사람들은 아무도 의심 안 해요."
고령이지만 그는 여전히 탄탄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등산로가 없는 산을 개척해서 오르는 개척산악회에서 그의 별명이 '탱크'였다. 멧돼지도 못 가는 덤불을 치고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덤불이 나타나면 그에게 선두를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산행은 무식해야 된다"며 "발로 밟고 양손으로 헤치고 무조건 치고 나가야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늘 그의 등산복은 터져 있다.
"늘 험한 데로 다니니 비싼 등산복이 필요없어요. 새 옷 입고 산에 다녀오면 그날 바로 뜯어져 있어요. 그러니 늘 싸구려만 입죠. 도봉산 같은 곳에서 패션쇼 하는 것처럼 비싼 등산복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진짜 산꾼은 아니라고 봐요."
문정남 선생은 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전국의 산을 누빈다. 온 종일 산행하고 내려와 운전하면 졸음운전으로 사고가 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또 원점회귀로 코스를 잡기도 어렵다. 주로 열차를 선호하는데 만 65세 이상 30% 운임 할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까지 가는 버스를 타는 게 가장 관건인데 시간이 안 맞을 때는 택시를 타기도 한다.
"대간이랑 정맥을 타고, 기맥이니 지맥 종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어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우리도 대간이랑 정맥은 다 탔어요. 산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더 어려워요. 하나 올라갔다가 마을로 내려와 도로를 걸어서 다른 산 입구로 가서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와요. 아스팔트길이 얼마나 피곤한데요."
암 재발 후 차라리 산에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산행
지방 중에서도 당일로 다녀오기 먼 곳을 갈 때는 며칠씩 머무르며 산을 탄다. 매일 산을 다니다시피 하기에 비용을 줄이는 것도 중요해, 보통 찜질방에서 잠을 잔다. 산에서 먹을 점심을 아침에 편의점에서 햇반을 미리 데워 간다. 점심쯤이면 다 식지만 반찬 몇 가지만 있으면 끼니를 때울 수 있다. 문 선생이 1만 산을 타는 데 가장 공헌한 이는 그의 부인이다.
"집사람이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밥 해주고 산에서 먹을 도시락을 싸주죠. 밤에 집에 오면 저녁밥 차려 주고 빨래도 하죠. 귀찮다고 잔소리 한 번 한 적 없으니 아내가 제일 큰 공로자죠. 사실 저는 독재·가부장적인 가장이라 내가 하는 일에 가족들의 찬반이 있을 수 없어요. 또 내가 이 나이에 이 걸 안하면 뭘 하겠어요."
'산에 미쳤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는 닥치는 대로 산을 탔다. 그 시작은 암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왜 암에 걸렸습니까"하고 물었다. 의사는 "첫째가 스트레스, 둘째는 술·담배, 셋째는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담배는 평생 피운 적이 없고 술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평생을 상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한 그는 정년을 2년 앞둔 1998년, 교장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나가시기 전에 학생부장을 맡아 땅에 떨어진 학교의 기강을 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바친 교직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 열정을 학교에 쏟기로 했다.
"복장 단속, 흡연 단속, 두발 단속. 아무리 순찰을 돌고 해도 막을 수 없어요.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에 담배 연기가 꽉 차요. 걸린 애들 그냥 보낼 수 없으니 일일이 벌세우고, 또 요즘 애들이 어디 말이나 제대로 듣나요. 막 대들어요. 그러니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였죠."
직장암 2기 말에서 3기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아산병원을 찾았으나 1차 수술 결과는 실패였다.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문씨는 "그냥 수술 안 하고 죽겠다"며 수술을 거부했다.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술 전 25일간 물 한 방울 안 먹고 링거를 맞으며 살았다. 내내 들었던 생각이 "물 좀 마셔 봤으면"이었다. 더구나 병실에만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당시 몸무게가 65kg에서 45kg으로 줄었다.
"그때 내 몰골을 본 사람들은 제가 죽을 줄 알았대요. 재수술 안 받으려고 집에 갔는데 너무 아파서 다시 응급실에 온 거예요. 결국 의사의 설득으로 재수술을 받았어요."
수술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후 6개월 동안 항암주사를 맞았다. 통원하며 1주일간 주사를 맞으면 3주일을 쉬는 방식으로 6개월이 지났다. 몇 년을 그렇게 반복했다. 그러나 다시 상태가 나빠졌다. 암이 간으로 전이된 것이다. 암이 전이되면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상당히 낮아지기에 그에게는 사형선고였다고 한다. 어떻게든 수술 안 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으나 간 뒤쪽으로 암이 퍼져 결국 수술 날짜를 잡아야 했다. 그는 수술 전 고향인 충북 영동 땅에 묏자리를 보러 갔다.
그는 퇴직 후 산을 본격적으로 타기 위해 "500개 산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300산쯤 올랐을 때 암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늘 '500산을 타게 해달라'고 빌었고, 항암치료를 받을 때부터 산에 다녔다. 남들이 다 말려도 차라리 산행하다 죽겠다고 맘을 굳게 먹고 산으로만 쏘다녔다.
기적적으로 암 세포 사라져
의사가 "암세포가 가장 싫어하는 게 산소"라 했으니 산소 함유량이 가장 높은 산으로 가는 게 최고의 치료방법이라 믿은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산에 가면 큰 소나무를 끌어안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함께 산에 온 일행은 무슨 소나무한테 비냐고 했지만 그만의 기도 방법이었다. 그는 산행을 하면 자연스레 산에 몰입해 잡념이 사라지고, 스트레스도 날아가 산이 암에 가장 좋은 치료약이었다고 한다. 산행 때문이었을까, 기적 같은 선물을 받았다.
"수술 기다릴 때의 마음,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마음이 지옥을 넘나들어요. 근데 수술 날짜가 연기되더니 CT를 찍자고 해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퇴원하래요. 간으로 전이된 흔적이 없어졌대요. 1,000명 중 한 명은 이렇게 나을 수 있다는데, 어쨌든 기적이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직장암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의학적으로 완치단계"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기적적으로 구한 게 산, 그리고 하느님이라 믿는다. 무교인 그였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아프면 신을 믿게 된다고 한다. 이후 500개의 산을 다 타고, 1,000산을 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여기까지 왔다.
"항상 정상에 섰을 때가 제일 좋아요. 낮은 산도 전망 좋은 데가 많은데, 그런 데에서 보노라면, 내가 시인은 아니라 말은 잘 못하지만 진짜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 맞습니다. 외국 산의 정상은 장쾌한 맛은 있지만 우리나라 산처럼 아름답지 않아요. 개인적으로는 육산보다 암릉이 있는 다이내믹한 산을 좋아하는데 저는 북한산이 제일 좋아요. 북한산만 한 산도 없다고 봐요."
외국 산은 일본 북알프스를 종주했으며 대만 옥산, 중국 옥룡설산,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 미국 탈라크, 랑탕 히말라야 얄라피크(5,732m)를 등정했다. 폐활량이 남들보다 좋아서 2011년 72세의 나이에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도 올랐다."등산 이외에 다른 일은 안 해요. 내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게 산이고, 산이 내 모든 희망입니다. 어쩌다 이틀 연속 쉬면 산에 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요. 그러다 산에 들어서면 '어머니 품에 왔구나', '고향에 왔구나'하며 마음이 편해져요."
그는 충북 영동 황악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가난하여 고등학교도 3년을 늦게 들어갔다. 졸업 후 상경해 벽돌공장에서 일하던 중 당시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 서무과에서 근무하던 사촌형의 추천으로 대학 안의 논과 정원 관리를 맡았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자 당시 최옥자 학장의 스승이었던 김현실 교수가 성실함을 인정해 야간대학에 보내 주었다. 오후 4시에 퇴근해 한양대 화학과를 다녔고 졸업 후 화학 교사가 되었다. 이후 광신상고에서 28년간 근무했다. 당시 상고는 "가난한 아이들이 다녔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성실'을 가장 큰 덕목으로 가르쳤다. "누가 보든 말든 항상 성실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가난한 이에게도 기회가 온다"는 것이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말이다. 그에게 1만 개가 넘는 산과 봉을 오른 소회를 물었다.
"사람이 꾸준히 전진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도 이룰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인생살이도 등산과 같아요. 내려갈 때 있으면 올라갈 때 있죠.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걸으면 정상에 닿아요."
1만 산 등정이라는 목표를 이뤘지만 그는 여전히 산행을 멈추지 않는다. 1만 산 목표를 이룬 후에도 5월 한 달 동안 100개의 산과 봉을 올랐다. "산에 다니지 않으면 게을러질 것 같아 계속 산을 오를 생각"이라 한다. 그에게 산은 행복한 취미를 넘어 존재의 이유라고 해도 좋을 대상이 되었다. "죽을 때까지 산에 가겠다"는 산에 모든 걸 건 사나이, 문정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