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경상북도

영천 자라등(293.4m)- 말머리산(회룡봉.455.6m)- 징경산(517.5m)- 봉암산(240.5m) 산행 및 문화 유적 답사

산여울 2022. 12. 13. 22:05

ㅇ. 산행 일자: 2022년 12월 13일(둘째 화요일)

ㅇ. 산행지: 영천 자라등(293.4m)- 말머리산(회룡봉.455.6m)- 징경산(517.5m)- 

                          봉암산(240.5m) 산행 및 문화 유적 답사

ㅇ. 날씨: 대체로 맑음

ㅇ. 참석자: 김명근, 이종서, 송형익 이상 3명

ㅇ, 산행 및 탐방 시간: 산행 시간→ 오전 7시 40분~ 오후 12시 40분(5시간)

                                    문화 유적 탐방시간→ 오후 1시 20분~ 오후 2시 40분

                                                                       (차량 이동시간 40분 포함: 2시간) 

 

ㅇ. 산행코스: 새터 입구 삼거리(임고면 금대리 1054)- 산길 들머리- 자라등 정상-

                      말머리산(회룡봉) 정상- 삼각점봉(479.7m)- 징경산 정상- 새만금포항고속도로

                      (대구-포항) 지하통로- '운주로' 합류- 임고면 사리 1146-1' 과수원- 봉암산 정상-

                      금대교- 새터 입구(산행 종료, 10.95Km)- 차량 이동- 산남의진 추모비- 차량 이동-

                      용계서원- 차량 이동- 영천댐 망향공원- 차량 이동- 강호정, 하천재(부 비각),

                      오회공 종택, 오회당,사의당, 삼휴정 탐방

 

ㅇ. 산행지도

징경산.jpg
1.52MB

     지난 5일 영천 지역 산행에 이어 오늘도 영천시 임고면의 영천호 주변에 있는 3개의

     미답산을 답사하기 위해, 원점 회귀 산행 코스의 기종점으로 잡은 '임고면 금대리 1054'

     새터 마을 입구 삼거리 한쪽 공터에 주차를 하고는, 주변 일대의 지형을 잠시 둘러보노라니

     북쪽 방면으로 우리가 진행하게 될 능선들이 제법 우람한 모습으로 펼쳐져 보이네요.

     새터 마을 진입로인 좌측 포장 수렛길을 따라 들어가며 산행에 들어갑니다. 아담한

     전원주택 두어 채를 지나~~~

     150m 정도 진행하니 우측 산자락으로 오르는 희미한 산길 들머리가 나오고~~~

     이리로 올라붙으며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가게 되는데, 올라서자 말자 전면이 확 트이며

     산자락에 넓게 자리 잡은 '성주 이 씨' 문중 묘역이 펼쳐지네요.

     너른 묘역을 가로질러~~~

     계속해서 이어지는 임도 수준의 널따란 산길을 따라 한동안 진행하노라면, 어느 순간

     소롯길로 바뀌고~~~

     잠시 후 나오는 무명봉 직전 갈림길에서는 우측 사면으로 뚜렷하게 나있는 우회길을

     이용해서 진행한 후, 다시 능선길로 올라붙어 진행을 하노라니~~~

     6~7분 후 좌측 지경 마을 쪽에서 올라오는 듯한  산판길 수준의 널따란 능선길과 합류를

     하네요. 우측 널따란 능선길을 따라 오르노라면~~~

     차츰 고도를 높여가더니 오프로드 차량의 바퀴 자국(?)인지 양쪽으로 깊게 파인 가파른

     산판 길이 한동안 이어지더니~~~

     산길 들머리에서 25분여 만에 삼각점이 설치된 자라등 고스락(293.4m)에 올라섭니다.

     인증샷을 하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맞은편 능선길을 따라 말머리산으로 이어가노라면~~~

     뜻밖에도 이정목도 두어 개 나오고 하더니~~~

     자라등 정상에서 30여 분 만에, 지금으로 부터 20개월 전 인 2021년 2월 13일 종태

     아우와 둘이서 영천호 호반 쪽에서 최 단거리로 올라붙어 답사한 적이 있는, 낡은

     '산림욕 안내판'과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회룡봉(말머리산) 고스락(455.6m) 에 올라

     서네요. 당시에 걸어놓은 우리들의 표지기 외에 아직 다른 산꾼들의 표지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등산로 상태가 이렇게 양호한데도 불구하고, 워낙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산꾼들로 부터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오지의 산' 임이 확인이

     됩니다. 

     계속해서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서 마치 양탄자 같이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라, 3Km가량

     떨어져 있는 징경산을 향하여 여유롭게 진행하노라면~~~

     지도상에 표시된 삼각점봉(479.7m)도 지나고~~~

     '6.25 전사자 유해발굴 지역'도 한차례 지나고 한 끝에~~~

     말머리산에서 1시간 15분 여 만에 낡은 폐 산불 감시초소가 자리 잡고 있고,  '산줄기 체계'의

     대가이신 서울 신경수 님의 표지기가 하나 걸려있는 징경산 고스락(517.5m)에 올라서네요.

     아마도 이 산줄기도 신경수님의 '산줄기 체계'로 볼때 무슨 단맥에 속하는 모양이며, 그대로

     맞은편 능선길을 따라 계속해서 진행하면 운주산으로 이어집니다. 인증샷을 하고는~~~

     우리 일행들은  능선상으로 연결이 되지않는 봉암산 답사를 위해 초입이 불분명한

     우측 남릉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서며 하산 길로 접어 들면~~~

     된비알 인데다 설상가상으로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얼마나 미끄러운지

     엉덩방아를 한차례 찧고난 후 넘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써가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려가노라니, 고맙게도 얼마 안 내려가서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픽스 로프가 보이네요.

     로프에 의지해가며 ~~~

     가까스로 안부로 내려선 후 다시 거친 능선을 따라 잠시 치고 오르노라니 좌측으로

     임고 저수지가 저만치 내려다 보이더니 야트막한 봉우리로 올라서고, 봉우리를

     넘어서니~~~

     후손이 끊어졌는지 관리가 전혀 안 된채로 방치된 '통정대부 오천 정 씨' 쌍분

     묘역으로 내려서게 되고~~~

     이어지는 희미한 능선길을 따라 한동안 진행하니~~~

     관리가 잘 된 '영일 정 씨' 가족 묘역을 지나~~~

     안부 삼거리로 내려서는데, 우측으로 크게 꺾여져 나가는 완만한 임도가 이곳 묘역으로

     올라오는 진입로인듯 했으나, 지도상에 표시된 길 위치와 조금 달라 혹시나 다른 묘역으로

     이어지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발 짝 더 진행 하니~~~ 

     그제서야 지도상에 표시된 갈림길 삼거리에 이르는데 ,우측 내림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경사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엉덩방아를

     한차례 찧고난 후에야 ~~~

     가까스로 우측으로 돌아 내려오는 신설 진입로로 내려서게 되고, 완만한 좌측 진입로를

     따라 나가노라니 몇 발짝 안 가서 잡초가 우거져 있는 넓은 개활지로 내려서고~~~

     허리 깊이 정도나 되는 시멘트 수로를 한차례 건너고 나서야 널따란 골짜기 중앙부의

     임도와 합류합니다. 임도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니, 잠시 후 새만금포항고속도로(대구-

     포항) 지하 통로 앞 철책문에 이르네요. 우리가 진행해온 너른 골짜기 내의 황무지 일대가

     사유지인 듯합니다.

     철책문 좌측 틈새로 빠져나가 지하 통로를 막 건넌 양지바른 곳에서 중식 시간을

     느긋하게 가진 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 나가면, 잠시 후 무슨 위험물을 취급하는 기관인지 태극기가

     게양이 되어있고, '위험 접근금지'표지판이 부착된 건물 앞을 지나서~~

     바로 '운주로'와 합류하게 되고, 우측 도로를 따라 다음 산행지인 봉암산 쪽으로 진행

     하노라니,몇 발짝 안 가서 전면으로 '임고천'을 따라 온통 뼝대로 이루어진 봉암산 능선이

     저만치 건너다 보이네요. 봉암산의 산행기점으로 잡은  '동녘골'을 가늠해서 포장 농로와~~~

     임고천 제방길~~~

     그리고 임고천 하상으로 이어지는 잠수로를 거쳐~~~

     봉암산 지능선 끝자락 쪽으로 진행합니다. 잠시 후에 우리가 진행한 코스를 참고삼아

     아래 사진에 노란선으로 표시해봅니다.

     봉암산 지능선 끝자락에 이르니 주변 일대가 모두 과수원으로 조성이 되어 있는지라,

     과수원 안으로 들어선 뒤 산사면 쪽으로 접근하니, 다행스럽게도 과수원 울타리 시작

     지점이자 봉암산 지능선 끝자락에 희미하나마 족적이 보여, 이리로 올라붙으며 본격적인

     봉암산 산행에 들어갑니다.

     엄청 가파른 능선상의 희미한 족적을 따라 한동안 힘들게 치고 오르노라니~~~

     10여 분 만에 다소 평탄한 능선상으로 올라서네요. 그런대로 이어지는 좌측

     능선길을 따라~~~

     잠시 더 오르니 5분여 만에 관리가 잘된 무명 묘역이 건너편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는

     무명봉으로 올라섭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주변 조망을 즐기며 잠시 쉼을 한 뒤~~~

     맞은편 능선길을 따라 정상 쪽으로 진행하노라면, 능선 우측으로는 깍아지른 듯한 수십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짜릿한 스릴감마저 느껴지네요. 

     대체로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한동안 오르내리노라니, 산길 들머리에서 25분 여 만에

     삼각점이 설치된 봉암산 고스락(240.5m)에 올라섭니다. 인증샷을 하고는~~~

     맞은편 능선길을 따라 하산길로 접어들면, 얼마 진행하지 않아 능선 분기 지점에

     이르는데~~~

     우측 멀지않은 곳에 성터 같은 게 보여 조망도 즐길 겸 다가가보니, 돌축대로 조성된 

     참호인 듯하네요. 그대로 좌측으로 휘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려가도 되나~~~

     조금이라도 지름길로 하산하기 위해 직전 능선 분기 지점으로 이동해서, 좌측 능선길을

     따라 본격적인 하산길로 접어들면~~~

     잘 관리된 무명 가족 묘역을 한차례 거쳐서~~~

     능선 분기 지점에서 10여 분 만에 펜스를 둘러친 산자락의 경작지로 내려서게 되고~~~

     경작지를 벗어나 농로를 따라 금대교를 가늠해서 진행하노라면~~~

     규모가 제법 큰 과수단지 사이를 거쳐서~~~

     10여 분 만에 금대교에 이르게 되고~~~

     금대교를 건너가면 바로 금대리새터마을 앞 '운주로'와 합류하게 됩니다. 

     우측 '운주로'를 따라 250m 정도 진행하면, 출발 지점인 새터 마을 진입로 입구 삼거리에

     도착하며, 5시간 여 에 걸친 '자라등- 말머리산- 징경산- 봉암산' 원점 회귀 산행을 모두

     마치게 되고, 지금 부터는 차량으로 이동해가며 문화 유적 탐방에 들어갑니다.

ㅇ. 문화유적 위치도

강호정.jpg
1.16MB

ㅇ. 애국지사 충렬공원(산남의진 추모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영천,영일,청송등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박한종, 조상환, 최치환,전응팔,강봉학 애국지사의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에서 건립한 추모비입니다.

 

ㅇ. 용계서원(龍溪書院.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5호)

     용계서원(龍溪書院)은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용계서원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경은 이맹전(1392∼1480)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서원입니다. 정몽주의 절개를 닮은 이맹전 선생은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탐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닦으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정조 6년(1782)에 왕명으로 토곡동에 건립된 용계서원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노항동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영천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명암 이태일 선생 척장비

     안내문을 읽어보니 1913년 일제가 강제로 한일합병후 기념훈장을 전할 때, 받지

     않으면 목을 베어 천황에게 받치겠다고  위협을 하자 선생이 크게 분노하여 ‘내 목이

     베일지언정 훈장은 받을 수 없다‘며 마당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태일 선생의 애국정신을 높이 받들고 있는 비석이 늠름합니다.

ㅇ. 영천댐 망향공원

     영천시 임고면을 지나 영천댐 벚꽃100리길을 따라가다보면 영천댐 망향공원

     전시관을 만나게 됩니다. 1980년에 영천댐의 건설로 자양면 8개마을이 수몰되어

     실향민들의 애환을 달래기위해 건립된 망향공원과 전시관은,이제 고향을 찾는

     이들 뿐만 아니라 주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관광코스가 되어주는 곳 입니다.

     영천댐 망향공원 전시관은  마침 휴관일(매주 월 화 법정공휴일)이라 관람은 못했네요.

ㅇ. 강호정(江湖亭: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71호)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정세아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누각입니다. 선조 32년(1599)에 지은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입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당시 영천·경주지방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이 정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ㅇ. 하천재(부 비각) (夏泉齋<附碑閣>,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73호)

     하천재(夏泉齋)는 오천 정씨(烏川鄭氏) 문중의 묘소와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해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이 1637년에 세운 재실입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나 그 공로로 상을

     바라지 않고 관직을 떠나 시골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은 덕망 높은 선비였다고

     합니다.

 

ㅇ. 오회공 종택(五懷公 宗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여 영천·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수번의 셋째아들인

     호신이 결혼하여 살던 집입니다. 조선 광해군 12년(1620)경에 지었으며, 효종 6년(1655)

     에는 사당을 세웠으며, 1977년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ㅇ. 오회당(五懷堂,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이 건물(建物)은 오회당 정석현(鄭碩玄)을 추모하기 위하여 1727년(영조 3년)

     관찰사(觀察使) 권대규(權大規)의 후원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자양면 삼귀리에

     위치했던 오회당은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 현 위치인 자양면 성곡리로

     이전·복원하였습니다.

 

ㅇ. 사의당(四宜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사의공(四宜公) 정중호(鄭重鎬), 정중기(鄭重岐), 정중범(鄭重範), 정중락(鄭重洛) 형제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안채인 수의헌(守宜軒), 사랑채인 사의당, 고방채

     그리고 문간채 등 모두 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ㅇ. 삼휴정(三休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임진왜란 때 영천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정세아(鄭世雅)의 증손

     호신(好信)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호를 삼휴(三休)라 하였으며,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자연을 벗삼아 작사(作詞)

     하는 데 뜻을 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정자에 걸려 있는 원운(原韻)을 살펴보면, 이 정자는

     여울가에 자리하고 있어 물소리가 베갯머리로 스며들었고, 주위는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쳐놓은 듯이 수많은 봉우리가 이어져 경승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천댐이 축조되면서 수몰당하는 운명에 놓여 지금은 옛자리를 굽어보는

     산비탈로 옮겨져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오천정씨 문중묘역은 음택(陰宅) 자리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정효자가 얻은

     명당이라는 하절에는 울창한 노송들이 둘레 약 2㎞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99기의 큰 무덤들과 비석들이 있습니다. 하절에서는 많은 무덤 중에서도 두 개의 무덤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의병장 호수 정세아 무덤 앞에 있는,

     장남인 백암 정의번과 종 억수의 무덤입니다.

     정의번은 임진왜란 때 영천성을 수복한 후 경주성 탈환을 위해 호수공을 따라 출전

     했다가 호수공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자 세 차례나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적의 포위망을 뚫었고 아버지는 위험을 벗어났으나, 아버지의 무사함을 알지 못한 백암은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면서 종 억수에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죽음이 당연하지만 너는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느냐? 내 곁을 떠나거라.”고 말했으나 억수는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군신과 부자와 노주는 일체라. 주인이 아버지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셨는데

     종이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함께 적진에 쳐들어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     호수공이 사후에 정의번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고 시체 대신 장사를 지내니 시총(詩塚)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네요.

​     정의번 묘소 앞의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고 적힌 억수의 무덤은 주인의 무덤에

     비해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정씨 집안에서 4백여 년간 묘사 때마다 그의 충복됨을 잊지

     않고 제수를 차려 그의 넋을 달래주고 있다고 합니다..